다이스가 네임버스

다이스가 네임버스 AU. 사망소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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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運命)이란 목숨을 움직이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 혹은 그 힘에 의해 정해져 있는 목숨을 뜻한다. 모든 인과들이 맞아 떨어져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때, 우리는 종종 그것을 운명이라 일컫는다. 이게 다 운명이다, 결국 전부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라고.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아주 조금이지만 운명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것은 이름이다. 왼쪽 가슴, 쇄골에서 조금 아래로 떨어진 자리,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새겨지는 이름. 처음 이름은, 그저 조금 색이 다른 얼룩이었다가,  스무번째 생일이 지남과 동시에 서서히 형태가 잡히기 시작해 몇 번의 낮과 밤들이 지나면 본래부터 그 곳에 있었던 것 마냥 자연스러운 모양으로 나타났다. 그 시기가 절묘한 탓에 사람들은 이름이 완전히 자리를 잡아가는 그 기간을 성인식이라 칭했다.

 내 운명의 이름은 스가와라 코우시였다.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연애 중이었고, 나보다 여섯 달 정도 생일이 빠른 스가에게 먼저 내 이름이 새겨졌을 때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운명임을 알았다. 확인한 것은 내 이름 뿐이었지만 짝이 엇갈리는 경우는 픽션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므로 우리는 확신했다. 나는 부끄럽게도 조금 울었지만 스가는 그러지 않았다. 그 애는 그저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셔츠를 걷어 내 이름을 보여줬는데, 그건 내가 이전에 종종 우리가 그저 좋았던 시절의 기억으로만 남으면 어쩌지, 따위의 말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듯 흘리는 말에 스가는 늘 걱정마. 너랑 나는 운명이라니까? 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고 그 후에 우리는 평소에 곧잘 그러듯이 서로를 꼬집고 간지럽히는 장난들로 집 안을 몇 바퀴씩 구르고는 했다. 

 스가의 스무번째 생일로부터 사흘째 되던 날, 셔츠 자락을 쥐고 있던 손 아래의 맨 가슴. 그 위의 익숙한 글자들의 나열을 본 나는 멍청이처럼 한참 입만 뻐끔거리다 결국 그 애의 심장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수십 번 보아온, 그리고 앞으로 수백 번을 더 볼 내 이름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스가는 낯간지러운 짓은 그만두라며 나를 밀어냈지만 힘 같은 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아서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꼭 계약서에 사인한 것 같아."

 방학 때라 둘 모두 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있던 날이었다. 아무렇게나 쳐 둔 커텐 사이로 보이는 창 밖의 하늘은 맑았지만 전날의 뉴스에서는 유래없는 한파가 들이닥칠 것이라 예고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해 보이는 볕에 잠시 혹했던 우리는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다가 손 끝, 발 끝이 발갛게 얼어 붙은 채로 들어와서야 겨우 당분간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내가 대답이 없자 스가는 코타츠 아래의 다리를 발로 슬슬 건드렸다. 그제서야 그게 혼잣말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내가 뭐가? 물으니 턱짓으로 내 가슴께를 가리켰다. 몇 달 전에 발현한 제 이름이 있는 위치였다.

 스가는 유난히 이름에 관심이 많았다. 평소보다 씻는 시간이 길어진다 싶으면 열에 아홉은 저에게 새겨진 내 이름을 살피느라 늑장을 부리는 거였다. 신기해서 그러느냐고, 언젠가 이유를 물었더니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니, 좋아서. 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되려 쑥스러워진 내가 눈을 피했다. 운명이란 건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거잖아. 너랑, 내가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고. 바꿔 말하면 온 세상이 너랑 내 사랑을 응원해 줬다는 거니까, 어떻게 볼 때마다 좋지 않을 수가 있겠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체에 평생의 반려가 될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을 낭만적이라 여겼으나 그 때문에 삶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살면서 단 하나의 사랑만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 이름 덕분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스무살 이후에 하게 되는 모든 사랑의 결과를 알 수 있다. 이미 끝이 날 것을 알고 있는 연애가 어느 정도의 좌절이나 절망, 허무함을 동반할지 나는 알 수 없다. 서로가 운명으로 정해져 있더라도 누군가는 연인을 사랑하는 것이 제 의지로 피어난 감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기도 한다고 했다.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 스스로가 골라 행동한 것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궤도를 따라 왔을 뿐 과거의 제 선택 따위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닐까 혼란스러워 한다고. 만에 하나 내가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순간 그 애가 평생에 걸쳐 그런 종류의 불안들로부터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리고 신이나 종교를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만큼은 스가와 나를 엮어준 어떤 거대하고 초자연적인 힘에 깊은 감사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죽는 날까지 서로 사랑하겠습니다, 하는 계약 같은 거."
"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네."
"그렇지?"

 자기가 내놓은 의견에 내가 동의했을 때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 스가의 모습에서는 늘 청량감이 느껴졌다. 졸업 후에 알게된 사실이었지만 세이죠의 오이카와가 마음 속으로 스가를 상쾌군이라 불렀었다는 게 이해가 갈 정도로. 나는 그 미소를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무엇인들 좋아하지 않았겠느냐만은- 그 애가 그렇게 웃으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많이 눈에 담으려 빤히 바라보는 습관이 있었다. 그럴때면 대개 스가는 느끼하게 쳐다보지 말라며 제 손으로 내 시야를 가리고는 했지만 그 날은 웬일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마주 바라봤다. 내가 도대체 언제쯤 시선을 피해야 어색하지 않게 이 눈싸움을 마무리 할 수 있을지 신중하게 타이밍을 재고 있던 와중에, 그 애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다이치, 나랑 결혼하자." 

 우습게도 그 순간 내가 떠올린 것은 언젠가 잡지에서 봤던 흰 턱시도를 입고 있는 스가였다.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업보라 하기에 스가는 모두에게 상냥했고, 강했고, 그리고 어렸다. 우리는 어렸다.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이기에 고작 스무 해 정도 밖에 살지 못한 나는 어렸다. 지독한 불운이라고 밖에는 설명 할 수 없다. 검고 끈적끈적한 그것이 그 애를 삼켜버렸다고 밖에는. 내게 그것은 세상의 악의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스가는 혼자서도 주위 사람들을 밝힐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빛나는 사람이었지만 고작 한 명의 인간에 불과했으므로 그런 지독하고 거대한 어둠을 쫓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애가 흰 턱시도를 입기를 바랐다. 수의 따위가 아니라.

 뺑소니였고, 스가를 친 차를 찾을 수는 없었다. 대낮의 대로변에서 일어난 사고였는데도 그랬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가족들부터 함께 배구를 했던 사내 녀석들까지 모두가. 나를 제외하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가 되어도 나는 울지 않았다. 다만 잠을 자지 못했다. 자고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그 애의 부재를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일념 때문일지도 몰랐다. 잠자리에 들지 못한 날들을 한 손으로 꼽지 못하게 되기 직전에야 나는 우리가 살던 작은 아파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둘이 앉으면 더도 덜도 없이 꼭 맞았던 작고 낡은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눈을 감았다.

 서로의 어깨가 닿을 정도로 작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코우시, 하고 부르면 스가는 무슨 말이라도 들어줄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이 좋아서 나는 종종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없어도 진지한 척 그 애의 이름을 부르고는 했다. 코우시, 하고 부르자 스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 본다. 참지 못하고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어깨를 그러안고 눈가가 화끈거리도록 울고 있으려니 그 애가 내 뒷통수를 쓰다듬는게 느껴졌다. 다이치, 주장이 돼서 그렇게 여유가 없으면 어떡해?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아직 고등학생일 적 시합 중에 들었던 말이다. 기억 속의 대사로 인해 나는 다시 한 번 이게 현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졸업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주장이라고 그래."
-으응 그렇지. 그렇지만 지금은 이게 가장 적절한 대사 같았는걸.
"코우시."
-응.

 나는 이제 어쩌면 좋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나는 입을 열지 않고 그대로 삼켰다. 어리광은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스가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 이제 가야 돼.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있는 내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하하, 나 다이치가 이렇게 어린애 같아 보이는 거 처음이야. 하며 실 없는 농담을 던졌다. 가야된다며. 응, 그치만 다이치가 걱정돼서. 이제 괜찮아. 거짓말. 스가는 그대로 팔을 뻗어 내 등에 둘렀다. 평소에 습관처럼 하던 포옹이었다. 나는 늘 하던 것처럼 그 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고, 그와 동시에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내 생각 너무 많이 하지마. 팔을 풀어내며 스가가 조근 조근 속삭였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람들도 잔뜩 만나. 끝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연애도 잔뜩 해. 다른 사람한테 다이치를 넘겨 주는 건 싫지만 내 핑계 대고 네가 평생 폐인처럼 사는 건 더 싫으니까. 그러면 마지막의 마지막에, 내가 데리러 갈게. 우린 운명이잖아? 그러니까 그 때 다시 만나.

 나는 눈을 뜬다. 그 애는 끝까지 스가와라 코우시였다. 스가가 늘 앉던 자리에는 내 눈물 자국이 남아 있다. 멀거니 그것을 바라보다 천장을 바라보도록 바로 누워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쇼파 팔걸이에 다리를 걸친 채로 이번에는 꿈 없는 잠을 바라면서. 깨어나기 전 그 애가 해줬던 입맞춤의 감촉이 눈꺼풀에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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